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강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이 전투로 인해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부흥군 세력은 멸망했다. 살아남은 부여풍은 고구려로, 그 외에 [[부여자신]] 등 부흥군의 지도자들은 [[왜국]]으로 [[망명]]했고, [[흑치상지]]나 [[사타상여]] 등은 당나라에 항복한다. 한편, [[부여충승]]과 [[부여충지]] 등 주류성의 부흥군 주력은 [[문무왕]]이 거느리는 신라군에게 항복하였다. 백강 전투는 백제부흥운동의 끝을 알린 전투 중 하나이며, 당시 백제와 왜국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후 두 달 가량 버틴 [[예산군|임존성]]마저도 함락당하고,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도주하면서 독자적인 [[백제부흥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친당계열의 백제부흥운동으로 당의 기미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가 있었으나 당나라의 제어를 받는 형태라 온전한 부흥운동이라 하기도 어려웠고 이 역시 약 10년 후 [[나당전쟁]]으로 광탈했다. 한편, 일본 측 기록에서 '더 이상 [[조상]]의 [[무덤]]을 보러 못 가는구나.' 하고 한탄했다는 문구를 두고 대중역사학계에선 당연히 의문을 품었고 왜인이 백제를 조상이라 여겼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 대목은 당연히 백제를 떠나 왜국으로 망명하는 백제인들이 말한 것이다. 한탄 직후 바로 다음 문구가 일본의 제장들과 상의해보자는 구절이라서 한탄한 게 백제인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전투 이후로 신라와 왜국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을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정반대로 《일본서기》 기록상 신라와 왜국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는 횟수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다. 백강 전투 이후 신라 사신 김동엄이 왜국에 파견된 후 곧 신라와 왜국 사이 국교가 재개되어, 8세기까지 외교교섭의 빈도수는 백제 때만큼 끈끈하지는 않았지만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잦고 활발했다. 이는 왜국과 신라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국 측은 백제 저항세력 수뇌부가 백강 전투로 완전히 무너졌으니 더 이상 백제 잔여 세력을 도와줘봐야 백제 부흥의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백제 저항세력에 이어 고구려까지 제거한 [[나당연합군]]이 이번엔 동맹의 한 축이던 [[왜국]]에도 쳐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규슈]] 지역 해안에 방어성을 쌓는 등, 혹여나 나당연합군이 왜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대비했다. 결국 실행되진 않았지만 <답설인귀서>에 의하면 당이 왜를 공격한단 명분으로 함선을 수리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 측의 설레발만도 아니었다. 신라 측 역시 이 전투 전후로 백제 잔여세력과 왜군을 정리한 직후 고구려, 그리고 결국 당나라와도 동맹을 깨고 싸우게 될 것을 차츰 확신할 여러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김문영]] 참수 소동, [[웅진도독부]] 설치, [[웅령 회맹]], [[취리산 회맹]] 등.] 그 전에 후방의 일본 방면으로부터의 위협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런 신라와 일본의 우호관계는 [[나당전쟁]]을 거쳐, 8세기에 [[발해]]라는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해 신라와 당이 다시 화친할 때까지 계속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